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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이란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나 책이나... 빛의 호위 의 첫인상은 그닥이었습니다. 짙은 회색빛의 표지. 그 위에 쓰인 흰색의 글씨. 사람의 시선을 끌만한 요소가 별로 없습니다. 표지 디자인만 본다면 그냥 지나치기에 쉬운...그러나...제게 있어서는 보석같은 책이었습니다. 그냥 지나쳤다면 책 내용도 좋았지만 무엇보다도 조해진의 문체가 정말 좋았습니다. 완전 취향저격!아껴가며 읽었습니다.표제작인 빛의 호위 를 먼저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목만 놓고 보면 어떤 이야기가 전개될 지 전혀 짐작할 수가 없습니다.두 개의 이야기가 교차합니다. 나와 권은의 이야기, 그리고 알마 마이어와 장 베른, 알마 마이어의 아들이 노먼 마이어의 이야기. 암흑에 빠져 있던 은에게 내가 건넨 필름 카메라 하나, 식료품점 지하 창고에서 숨어 살던 알마 마이어에게 전달되던, 한번도 연주되지 못했던 장의 악보들. 그것이 선의였든 무심히 건넨 것이든 어떤 누구에게는 내일을 꿈꿀 수 있는 빛 (23쪽)이 되기도 합니다. 절망 속의 구원은 결코 거창한 것이 아니며 아주 사소한, 하지만 인간에 대한 따뜻한 마음에서 비롯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일상에서 흔히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마음 속 깊이 잠재돼 있다가 불현듯 빛처럼 사람 사이에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태엽이 멈추고 눈이 그친 뒤에도 어떤 멜로디는 계속해서 그 세계에 남아 울려퍼지기도 한다는 것, 그리고 간혹 다른 세계로 넘어와 사라진 기억에 숨을 불어넣기도 한다는 것 역시, 나는 이제 이해할 수 있었다. (31쪽) 번역의 시작 은 상실의 아픔을 이야기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어지는 삶에 대해 말하는 것 같습니다. 안젤라와 영수씨는 나 의 곁에 없지만(떠났지만) 나는 그들의 삶과 꿈을 떠올리고 이어갑니다. 철컹철컹 철컹철컹 울리는 기차소리는 환상의 소리이면서도 내게만 들리는 사라진 사람들의 언어 (57쪽)입니다. 나는 살아있기에 그들의 언어를 번역할 수는 없지만 그들을 잊지 않는 한 그들의 언어는 여전히 내게 살아있습니다. 나 는 배들의 회항을 기다리는 텅 빈 항구 (58쪽)에 있기에 다시 번역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삶이 여기 없지만 그들의 온전한 삶을 번역하는 나 의 삶은 다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사물과의 작별 과 동쪽 伯의 숲 은 우리의 아픈 현대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바로 재일간첩단 사건과 동백림 사건. 독재정권 하에서 자행된 전형적인 인권유린의 사건이자 조작된 간첩단 사건입니다. 바로 그 조작된 사건 때문에 한 개인은 평생 한과 후회, 인내의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사물과의 작별 에서는 나 의 고모와 서군 이, 동쪽 伯의 숲 에서는 한나 와 안수 리 가 이에 해당됩니다. 억압의 시대에서 한 개인의 꿈과 사랑은 작은 파문조차 내지 못하고 스러지고 맙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흔적을 붙잡고 많은 이들의 생을 살아내고 있습니다. 어쩌면 피지 못한 사랑이고 꿈이기에 더 애틋하고 아련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사랑과 꿈을 고이 접을 수는 없습니다. 개인은 세계에 앞서고 세계는 우리의 상상을 억압할 수 없 (111쪽)으니까요. 물론 이 진술은 상대적일 수 있지만 적오도 고모와 한나에게는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억압된 세계 속에서 주체적 개인 혹은 그의 사랑과 꿈이 그 억압을 견디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되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산책자의 행복 역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삶을 다루고 있습니다. 친한 친구의 죽음 이후로 살아 있고, 살아있다는 감각에 집중 (142쪽)하는 메이린과 대학 강사에서 개인파산을 겪고 편의점에서 일하는 홍미영. 미영에게는 현재의 삶이 그냥 버텨나가는, 부끄러움의 연속일수도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녀는 살아있고 살고 싶어합니다. 주류에서 밀려나 하층의 삶을 살아가는 그녀에게 삶의 의미나 존재의 이유는 거추장스러운 사치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개인에 미치듯이 쫓긴 후 미치듯이 삶의 갈망을 토해냅니다. 메이린 역시 낯선 땅에서 산책을 하며 주변의 풍경을 보고 자신과 유사한 타인을 만나며 라오슈(홍미영)에게 편지를 띄웁니다. 사실 편지의 형식이긴 하지만 자신의 일기와도 같습니다. 뻔한 일상에 정착하지 못한 듯한 그녀의 삶에서도 삶은 여전히 또아리를 품고 자리하고 있습니다. 살아있다는 감각, 그것이 그녀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지탱하는 힘이 될 것입니다.이번 소설집의 특징적 양상 중의 하나는꽤 많은 인물들이 떠도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산책자의 행복 에서의 메이린, 잘가, 언니 의 언니, 문주 의 문주(나나) 등이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소설에서는 이들의 흔적찾기가 나타납니다. 흔적보다는 정체성 찾기가 맞을 지 모르겠습니다. 나이 차가 상당히 나지만 언니와 무척 닮은 나 가 미국에서 죽기 직전 언니의 삶의 추적하거나 문주인지 나나인지 정체성이 불분명한 인물이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해 한국으로 들어옵니다. 그들이 떠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내 안에 존재하는 또다른 나를 찾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이 세계 안에서의 나를 확인하는 과정이고 개인이 세계에 앞선다는 것을 입증하는 단초이기 때문입니다. 무너지고 있는 수많은 집들 (223쪽) 사이에서 노란 등만이 유일하게 빛을 내듯 수많은 개인 속에서 오지 그대로의 나 는 나 일 뿐입니다. 인생이 그러하듯 여전히 나 는 나 로 서기위해 오늘도 살아갑니다.전체적으로 소설이 어둡습니다. 그 바탕에는 상실이 있습니다. 그 상실의 폭압적 시대가 원인일 수도 있으며 가혹한 삶의 조건일 수도 있습니다. 그 속에서 누군가 삶의 현장에서 떠나갑니다. 그리고 그 죽음의 반향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이에게 전해지고 그는내면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렇기에 그들에게는 삶의 버팀목이 필요합니다. 어떤 이는 찰라의 빛이 그에 해당하고 어떤 이는 어떤 이는 떠나간 이의 흔적을 찾으며 동일성을 확인하고 또 어떤 이는 스스로의 뿌리를 찾으려 합니다. 우울함이 가득한 소설의 전반적 분위기 속에서도 결코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소설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사실 문장(문체)이었습니다. 특히 인물의 상황이나 감정을 표현할 때 나타나는 관념 혹은 추상의 구체화가 그것입니다. 잘못 쓰면 현학적 표현이 될 수도 있지만 이 소설에서는 그때 그 상황을 적확하게 나타내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문장 하나하나를 음미하며 읽을 수 있는 소설입니다. 그렇기에 글을 읽는 속도가 떨어지기는 하지만 내용 자체가 밝은 것이 아니기에 천천히 자신의 호흡에 따라 읽어나가면 됩니다. 또한 소설의 내용 역시 많은 암시와 여운을 주기에 빠르게 읽는다면 소설이 주는 묘미를 만끽할 수가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재미있는 소설은 아니지만 세계(시대)와 개인, 삶과 죽음, 만남과 이별 등 살아가면서 맞닥뜨려야 할 많은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작품을 읽으면 작품이 주는 여운에 잠시 호흡을 쉬어야 하는 소설입니다. 쉽게 읽히는 소설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올해 읽은 소설 중 가장 큰 울림을 준 소설입니다. 혹 이 글을 보시는 분이라면 조금은 긴 호흡으로 빛의 호위 를 만나시길 조심스럽게 권합니다.
저는 살아 있습니다.
살아 있고, 살아 있다는 감각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절망과 고독을 감싸주는 기억에 대한 9편의 이야기
2016 이효석문학상 수상작 「산책자의 행복」 수록
신동엽문학상(2013), 젊은작가상(2014), 이효석문학상(2016)을 연달아 수상하며 문단의 믿음직한 작가로 자리매김한 작가 조해진의 세번째 소설집 빛의 호위 가 출간되었다. 2013년부터 2016년까지 발표한 작품을 묶은 이번 소설집에는 소외와 불안의 문제를 개인의 삶을 통해 포착 하며, 이 시대에 호응할 수 있는 문학적 상상력이 무엇인지를 새롭게 환기한 작품 (심사평)이라는 호평을 받은 이효석문학상 수상작 「산책자의 행복」을 비롯한 9편의 작품이 수록되었다. 특히 이번 소설집에서는 조해진이 오랫동안 천착해왔을 뿐 아니라 세월호시대를 살아가며 더욱 견결해진 주제인 역사적 폭력이 개인에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 (한기욱, 해설) 하는 지점을 더욱 섬세하고 차분하게 파고든 점이 돋보인다. 작가는 절망과 고독을 감싸주는 기억들을 이야기하며, 사라졌으므로 부재하지만 기억하기에 현존하 (「사물과의 작별」 69면)기에 생존자는 희생자를 기억해야 한다 (「빛의 호위」 16면)는 절실함으로 단어 하나에도 진심을 담아 눌러 썼다. 조해진이 보듬어 전달하는 ‘빛의 호위’로 홀로 외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우리가 기억해야 하지만 어둠속에 숨어 있던 진실들에도 따뜻한 온기가 전해질 것이다.
또하나 주목할 점은 이번 소설집에서 조해진이 말하는 ‘살아 있음’에 대한 감각이다. 소설 속 인물들은 서로를 살게 하기 위해 고투하면서 그 힘으로 살아가는데, 그 상대는 아주 가까운 사람이기도 하지만 상관없는 이국의 누군가가 되기도 한다. 세상을 떠난 언니가 동생을 살아가게도 하며(「잘 가, 언니」), 어린 시절 친구에게 선물한 카메라가 그를 세상 밖으로 이끌기도 하고(「빛의 호위」), 신문에 실린 사진 한장이 먼 나라의 화가에게 작품을 완성하도록 부추기는 영감을 주 (「시간의 거절」 181면)기도 한다. 이렇게 서로를 살리는 절실함은 「산책자의 행복」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철학과 강사였지만 학과 통폐합으로 직장을 잃고 기초생활수급자로 살아가는 홍미영(라오슈)에게 답장이 없는 편지를 계속 보내는 중국인 제자 메이린은 살아 있는 동안엔 살아 있다는 감각에 집중하 (127면)라는 라오슈의 말을 되새기며 살아가고 라오슈는 현실에 괴로워하면서 마음속으로만 답장을 보내지만, 둘 사이의 믿음은 분명 서로를 살게 하는 힘이 되어준다.
빛의 호위 / 번역의 시작 / 사물과의 작별 / 동쪽 伯의 숲 / 산책자의 행복 / 잘 가, 언니 / 시간의 거절 / 문주 / 작은 사람들의 노래 / 해설│한기욱 / 작가의 말 / 수록작품 발표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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